③ 겨울의 광장
「그날 밤」이 대통령실·국회·계엄군의 시간이었다면, 「겨울의 광장」은 거리의 시간이다. 국회 앞에서 시작된 시민의 대응은 이후 넉 달간 여의도·한남동·헌법재판소 앞을 오가며 이어졌다. 이 챕터는 언론 보도로 확인되는 시민 반응만을 다룬다 — 직접 증언 채록은 이후 과제로 남겨둔다.
계엄 첫날 밤, 국회 앞
비상계엄이 선포된 직후 국회 인근에는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경찰 비공식 추산 약 4,000명에 달했다. 시민들은 계엄군의 국회 진입을 몸으로 막고 경찰 방패를 밀어내며 “비상계엄 철폐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초반의 격한 몸싸움은 시간이 지나며 “서로 넘어지면 일으켜주는” 상황으로 바뀌었고, 해제요구 결의안 가결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은 환호하며 철수하는 군용 헬기를 향해 구호를 외쳤다 (1203-ev-018).
탄핵 정국의 두 집회
12월 7일 오후, 국회에서 1차 탄핵소추안 표결이 의결정족수 미달로 불성립된 그 시각,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는 대규모 탄핵 촉구 집회가 열렸다. 경향신문은 지하철 승하차 인원을 근거로 약 28만 명, 뉴스타파는 통신사 생활인구 데이터를 근거로 최고점 약 37만 3천 명이 모인 것으로 각각 추산했다 — 산출 방식은 달랐지만, 참가자 중 20대 여성 비중이 가장 높았다는 점은 두 매체 모두 일치해 보도했다 (1203-ev-019).
12월 14일, 국회가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가결하자 여의도 집회 현장은 환호로 물들었다. 참가자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고, 현장은 “축제의 장"으로 변모했다고 보도됐다. 집회 인원은 주최 측 추산 약 200만 명, 경찰 신고 기준 약 20만 명으로 집계돼 큰 격차를 보였는데, 이는 같은 시기 다른 대규모 집회(광화문, 경찰 4만 명·주최 측 100만 명)에서도 공통으로 나타난 현상으로 보도됐다(1203-ev-020).
체포영장을 둘러싼 대치
2025년 1월 3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전직 대통령 윤석열에 대한 체포영장 집행을 시도하며 수사관들이 한남동 관저 인근까지 진입했다. 윤석열 지지자 수백 명은 밤샘 집회를 열고 “인간 바리케이드"를 형성해 집행을 막았고, 경찰은 경찰버스로 차벽을 세웠다. 인근 한강진역 부근에서는 탄핵 찬성 시민들도 별도로 체포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어 밤을 새웠다. 다음날인 1월 4일에는 ‘윤석열 체포 1박2일 집중 철야투쟁’ 중이던 민주노총 조합원과 시민 약 5,000명 이상이 관저로 행진을 시도하다 경찰과 충돌해 조합원 2명이 연행됐다 (1203-ev-021).
파면, 그리고 갈라진 반응
2025년 4월 4일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파면을 선고하자(1203-ev-002), 헌재 인근에서 철야 농성을 이어온 탄핵 인용 촉구 측 시민들은 결정문 낭독 중 “않습니다”, “아닙니다"라는 표현이 나올 때마다 환호했고, 선고 직후에는 서로 부둥켜안았다 — 현장에는 이태원 참사 유가족도 함께했다. 반면 헌재·한남동 관저 앞에 있던 탄핵 반대 측 시위대는 선고 직후 빠르게 해산했고, 남은 지지자들은 “우리 이제 어디로 가야 하냐"는 반응을 보였다. 탄핵 인용을 촉구해 온 단체는 이후 광화문에서 “국민저항권 발동” 집회를 예고(신고 인원 20만 명)한 반면, 탄핵에 반대해 온 단체는 예정돼 있던 여의도 집회를 취소하고 헌재 결정을 받아들인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경찰은 이날 기동대 약 1만 4천여 명을 배치했다(1203-ev-022).
챕터를 나가며
계엄 당일 밤 국회 담장 앞에서 시작된 거리의 대응은, 넉 달 뒤 헌법재판소 앞에서 환호와 해산이 갈리는 장면으로 일단락됐다. 이 사이 국회 안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 다음 챕터 「탄핵 심판」은 12월 14일 탄핵소추안 가결부터 이듬해 4월 헌재의 파면 결정까지, 법정 안에서 벌어진 심리 과정을 다룬다.
이 챕터의 이벤트
이력
인용
베리타임(Veritime), 「12·3 내란 사건」 컬렉션, 「③ 겨울의 광장」 (1203-narrative-03). https://veritime.org/c/1203/story/3/